[중앙선데이]농아학생, 일반학교 전국대회 준우승 관련 보도

권오일 0 8,163 2011.07.0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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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럴림픽 아닌 올림픽 금메달, 꿈꾸면 이뤄집니다”

정영재의 스포츠 오디세이 <12> ‘에바다학교 신화’ 일군 권오일 교장

스포츠 에디터 jerry@joongang.co.kr | 제224호 | 20110625 입력 

에바다 탁구의 목표는 세계 정상이다. 패럴림픽이 아니라 올림픽 금메달이다. 권오일 교장(오른쪽) 앞에 있는 선수가 전국대회 2위에 오른 김서영양이다. 평택=조용철 기자 

탁구 경기는 ‘눈 절반, 귀 절반’이라고 한다. 공이 상대 라켓에 맞는 ‘소리’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상대가 세게 쳤는지 살살 쳤는지, 깊게 커트를 했는지 얕게 했는지는 소리를 통해 감지한다. 따라서 청각장애 선수가 비장애인과 맞서는 건 11점 경기에서 5점을 접어 주고 하는 것과 같다.

경기도 평택에 있는 청각장애 특수학교인 에바다학교 탁구선수들이 이 상식을 보란 듯이 깨고 있다. 이 학교 초등부 2학년 김서영양은 지난 3월 열린 회장기 전국 초등학교 탁구대회 저학년부에서 비장애인 선수들을 차례로 꺾고 결승에 올랐다. 상대는 ‘탁구 신동’으로 TV 프로그램에도 소개된 신유빈(군포 화산초등교)양. 접전 끝에 세트 스코어 1-3으로 졌지만 당당히 은메달을 따냈다. 같은 달 열린 경기도 대회에서도 에바다학교 팀이 남자단체 3위를 차지했다. 이제 에바다학교 선수들이 비장애인을 이기는 건 더 이상 이변도 뉴스도 아니다. 이들은 다음 달 전국대회 첫 우승을 노리고 있다.

에바다학교 전교생 60명 중 13명이 탁구부다. 모두 청각장애 또는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아침·오후·야간 등 하루 7시간의 맹훈련을 소화한다. 다른 학교 선수들보다 훈련량이 훨씬 많다. 지도교사가 일일이 수화로 설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한 박스에 든 400~500개의 공을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며 받아치다 보면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들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기 차례가 끝나도 교사들 근처를 얼쩡거린다. 한 번이라도 더 공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탁구부에 들고 싶다며 전국에서 장애아동들이 찾아온다.

‘라켓 양쪽 색깔 달라야’ 뉴스 보고 환호

‘에바다 신화’를 만든 주역은 이 학교 권오일(49) 교장이다. 탁구선수 출신으로 대구대 특수교육과를 졸업한 그는 1993년 에바다학교에 부임하며 탁구부를 만들었다. 창단 1년 만에 비장애인 대회에서 3위에 올랐다. 학교의 지원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자비를 털고 방학과 휴가를 반납한 열정의 결실이었다.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고, 탁구장을 지어 주겠다는 제안도 들어왔다.

그런데 학교 측에서 전혀 뜻밖의 반응이 나왔다. 취재를 위해 찾아온 기자들을 쫓아내고 탁구실에 못질을 해 폐쇄해 버렸다. 비리로 얼룩져 있던 재단 사람들은 학교가 외부에 알려지는 게 못마땅하고 겁났던 것이다. 급기야 권 교사를 금품수수 명목으로 파면했다. 오랜 갈등 끝에 학교는 정상을 되찾았고, 권 교사도 복직했다. 2004년 탁구부를 부활시킨 그는 교감을 거쳐 올해 3월 교장에 올랐다.

80년 초등학교 코치 시절 청각장애인을 처음 가르친 그는 ‘전문적으로 훈련하면 충분히 비장애인과 겨룰 만하다’는 확신을 가졌다. 문제는 러버였다. 탁구 라켓 양쪽에 붙이는 고무의 성질이 전혀 다른데 색깔은 똑같았다. 소리로 양쪽의 구질을 구분해 내지 못하는 청각장애인들에겐 치명적인 핸디캡이었다. 권 교장은 ‘군대 30개월 동안 이 문제를 꼭 해결하겠다’는 각오를 안고 입대했다. 온갖 상상력을 동원, 연구해 봤지만 해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전역을 3개월 앞둔 85년 7월, 신문에서 ‘국제규정이 바뀌어 양쪽 러버 색깔을 달리해야 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허탈했지만 곧바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젠 됐다. 지성이면 감천이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소매치기 중학생을 바꿔 놓은 탁구

권 교장을 거쳐간 제자들 중에 가장 기억나는 아이는 상호(가명)다. 소년원을 갔다 온 상호는 중1 때 이미 전문 소매치기였다. 교사들도 건드리지 못하는 상호에게 권 교장이 탁구로 접근했다. “장애인 국가대표가 되면 비행기를 타고 외국을 다닐 수 있다”며 바람을 잔뜩 넣은 뒤 “일주일 뒤 선수 선발 테스트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상호는 열심히 연습했지만 운동신경이 워낙 떨어졌다. 테스트가 끝난 뒤 권 교장이 전교생 앞에서 두 명의 합격자를 발표했다. 상호의 이름이 불리자 아이들이 말도 안 된다며 난리를 쳤다. 권 교장은 “당장의 실력보다 장래성을 보고 뽑았다. 상호가 지금은 실력이 떨어지지만 누구보다 정신력이 강해 곧 최고 선수가 될 것”이라고 상황을 정리했다. 눈물을 뚝뚝 흘린 상호는 그날 이후 졸업할 때까지 지각·결석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오전 7시 훈련을 위해 5시에 집을 나섰다. 상호는 선수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착실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다.

권 교장이 믿는 ‘스포츠의 힘’이 바로 이런 것이다. “스포츠는 사람의 생각과 인생을 바꾸는 파워가 있습니다. 장애인 스포츠를 ‘어려운 사람들끼리 모여 열심히 하는구나’ 식의 동정이나 시혜 차원에서 접근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비장애인과 경쟁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도록 해 줘야 합니다”고 그는 말했다.

한국 장애인 스포츠는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법이 바뀌어 장애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김연아·박태환과 똑같은 액수의 연금을 받는다. 올림픽과 패럴림픽(장애인 올림픽)을 통합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장애인이 스포츠를 평생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에바다학교 탁구부 출신 중에는 모윤솔-모윤자 자매 등 대학에서 특수체육을 전공하는 이가 꽤 있다.

에바다학교 탁구의 목표는 세계 정상이다. 패럴림픽이 아닌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다. 권 교장은 “남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남다른 꿈과 뛰어난 집중력이 있습니다. 원석이 단단해 작업하기 힘들수록 좋은 조각 작품이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치죠”라고 의지를 보였다.

에바다학교는 지금 낡은 교실과 기숙사를 리모델링하고 있다. 권 교장은 아담한 체육관도 짓고 싶어한다. 지역 주민에게 개방해 언제든 와서 운동도 하고, 행사도 갖고, 아이들과 어울리는 열린 공간을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장애인시설이 더 이상 혐오·기피시설이 아니라 지역주민에게 도움을 주는 곳이 돼야 한다는 게 권 교장의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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